-
인정받고 싶으시죠?성경 2023. 10. 8. 22:53
주일이면 제일 분주한 곳이 교회일 것입니다.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성도 분들의 헌신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분들의 노고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져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문제는 누구나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장소에서 사역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방 봉사나 청소 등에는 항상 일손이 달리기 마련인데요. 그래서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또는 남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에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창 4:2~8)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걸까요?
사실 성경 자체로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특별한 이유는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이는 성경 전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헛갈릴 수 있는 부분은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의 종류입니다. 분명한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양이건 곡식이건 어떤 제물을 받으시던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에서 두 렙돈의 여인의 비유에서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그 크기나 종류보다는 마음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교회 공동체들은 누가 십일조를 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금액을 헌금했는지를 가지고 직분을 주고, 그렇게 한 사람만이 마치 신앙심이 더 깊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잘못된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가인과 같은 자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교회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몰리기도 하는데요. 직분 자라는 이유로, 교회를 오랫동안 출석했다는 이유로, 교회 내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이나 사역에 대해 허락을 받지 않고 사용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하거나 면박을 주기가 일쑤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한다는 자들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곤 합니다. 이는 가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선악을 구분하는 인간의 원죄와 이기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반면 사람들 앞에 드러날 수 있는 사역자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회중 앞에 서는 분들 같은 경우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기에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안 보이는 곳에서 헌신하는 분들의 질투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역은 모두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살아 있는 제물과 같습니다. 아벨이 드렸던 제물은 칭송받는 곳에서 하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곡식보다는 고기가 좋아 보이기 때문일 텐데요.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항상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죠. 이는 결국 하나님이 아닌 내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꼴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지적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위치가 어디인 줄 기억하시나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9)
우리는 선악과 사건에 대해서는 기억하지만 그 위치가 어디 있었는지, 또 생명나무의 존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동시에 선악과를 함께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함께 두셨을까요?
단순히 우리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기 때문에 애초에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될 수 없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라는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그분은 우리 인간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에덴동산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곳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배치하심으로써 그분을 기억하게 하고, 먹을 것(에덴동산의 모든 것)과 먹지 말라고 하는 단 한 가지(선악과) 약속을 통해 당신을 기억하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뱀의 꾀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사랑 이외의 것들을 보게 되는 죄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늘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늘 성경 전체에서 역사하셨듯이 늘 사람의 중심을 보는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며 괴로워할 것 같으면 차라리 그 직을 다른 분께 양보하는 게 낫습니다.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영광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분들이 존재하기에 교우들의 칭송과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그 계명을 온 인류에게 심어주시고자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신실한 교제를 할 수 있는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른 신앙이란. (0) 2023.10.24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0) 2023.10.09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2) 2023.10.06 영생이란. (1) 2023.10.05 내것이 아님을 깨닫는 은혜 (1) 2023.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