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진정한 용서란 무엇일까?

준교수 2023. 3. 29. 22:58

살다 보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그런 일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인 신애(전도연)는 남편과 사별 후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가게 됩니다. 신애는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하다가 아들 준이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에게 아들이 납치,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아들을 잃은 후 상처 입은 신애는 교회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찾게 되고, 기독교가 강조하는 그리스도 정신에 따라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살인범을 만나러 교도소를 갔으나 그 살인범은 신애에게 사죄하기는커녕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면서 멋대로 마음의 짐을 털어낸 뻔뻔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를 본 신애가 좌절하여 하나님을 증오하게 되며 그리스도인들의 용서에 대한 비판을 그려내고 있는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용서는 무엇일까?

 

[마태복음 18:21~35]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형제가 내개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에게는 빚을 갚을 돈이 없었으므로 왕은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사람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그래서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러고서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는 1만 달란트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성경 속에서 통상 하루 품삯으로 받는 돈은 1데나리온입니다. 그리고 1달란트는 1,000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하루 품삯으로 받는 돈이 겨우 1데나리온이었는데, 1달란트를 모으려면 아마 평생을 모은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빚은 1만 달란트의 크기라고 하십니다. 수치상으로만 봐도 절대적으로 우리 일 평생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된 혜택은 1만 달란트 크기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100데나리온 밖에 안되는 빚을 받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마음이 있다면 과연 누구의 인생이 더 괴로울까요? 게다가 그 대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 삶은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다시 영화 '밀양'의 얘기로 돌아와 주인공 신애가 살인범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살인범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하는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데요. 이것은 언뜻 보면 세상의 논리에 들어맞아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용서에 대한 비판이자. 무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사람들은 1 달란트의 은혜받았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대속하심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야 것입니다.